ART & TRAVEL / BOOK
Aug 15, 2018

THE HOURS BEFORE DAWN

활기와 단단함을 지닌 배우 정경순은 이제 좀 남기는 삶을 살자고 말한다.

THE HOURS BEFORE DAWN

디자이너 제이백쿠튀르의 치마를 입고 카메라 앞에 앉은 배우 정경순.

배우 정경순의 첫인상은 데이비드 헤어의 희곡 <남모르는 환희>의 여주인공 이자벨처럼 기질적으로 굉장히 즐거운 여자이자 강한 사람이었다. 그 활기와 단단함은 깊고 그윽한 경지를 이룬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빛이다. 어느 누가 알아주지 않고 감탄하지 않더라도 홀로 할 바를 이뤄가는 사람. 계산에 밝지 않지만 소신을 지키며 진실로 삶을 사는 사람. 성석제의 단편집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에 실린 동명의 단편 속 순박한 농부 황만근의 삶이 그랬듯이 말이다. 

“이제 좀 남기자. 자식 사랑도 모든 걸 다 바치지 말고 좀 남기고 할 말도 다 하지 말고 좀 남기고 미움도 남기고 욕심도 다 추구하지 말고 남기자. 그린벨트도 남기고 빈 땅도 다 개발하지 말고 좀 남기고 일등만 다 갖지 말고 이등뿐만 아니라 꼴찌를 위해서도 좀 남기자. 편리함만 추구하지 말고 불편함도 좀 남기고 오래된 것들은 누추해도 남겨두자. 화도 다 내지 말고 욕도 다 하지 말고 남기고 몸의 아픈 것도 조금은 남겨두자.” 책 <남김의 미학> 속에서 공감 가는 구절을 줄줄 읽어 내려가던 그녀는 진리를 깨달은 사람처럼 말한다. “몸이 너무 아픈 곳 없이 건강해도 욕정만 넘치게 되거든요. 어느 정도 자신의 나이대로 아파야 비로소 타인을 생각하게 되고, 내려놓게 되고, 인생을 사색하게 돼요. 너무 좋은 것만 누리면 세상이 어지러워지죠.” 그녀의 말을 듣자 배우란 이런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배우를 하는 이유 같은 건 모르고 살지만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고 싶은 이들 말이다.

THE HOURS BEFORE DAWN
남산 독일문화원 도서관에서 몇 권의 책을 골라 보는 배우의 뒷모습.

1983년 연극 <수전노>로 데뷔해 25년간 꾸준히 연극, 영화, 드라마에서 다양한 캐릭터로 변신해온 정경순은 언제 어떤 모습으로 등장해도 어색하지 않은 배우다. 한동안 스크린이나 브라운관에서 보이지 않을 때면 그 얼굴이 그리워지는데, 최근에는 건강관리에 집중하다 보니 뜻하지 않게 체중 감량이 되어 제2의 전성기라고 해도 될 만큼 우아한 분위기를 지녔다. 왈가닥 아줌마, 쿨내 진동하는 베테랑 수간호사, 자애로운 황후의 역할까지 극의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배우. 하나의 캐릭터를 고수한다기보다 떠돌이처럼 어떤 옷이든 입고 소화해내고야 마는 그녀가 “어떤 역할이든 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있다”고 말하는 데는 여전히 소녀처럼 호기심이 왕성하기 때문이다. 정경순을 잘 아는 지인은 “나이보다 훨씬 젊은 정신을 가진 분이에요. 항상 에너지가 넘치고 직접 화법으로 얘기하는 것이 매력이죠”라 평한다. 화통하고 시원스럽게 의견을 표현하는 반면 자신에게 겸손한 태도와 타인을 편견 없이 받아들이는 삶을 살 수 있는 데 일조한 것이 바로 독서다. 

THE HOURS BEFORE DAWN
왼쪽부터 문학평론가 이남호가 월간 <현대문학>에 연재했던 글에 사진을 더해 출간한 에세이집 <남김의 미학>, 제2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인 구병모 작가의 <위저드 베이커리>, 미당 서정주의 젊은 시절 시를 모은 <화사집>.

이 칼럼에서 배우와 얘기를 나누는 건 처음이라 기대됩니다.
저도 이런 인터뷰가 참 신선해요. 대부분 젊은 여배우들에게만 관심이 쏠리거나 인터뷰를 한다 한들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했지 내가 무슨 책을 읽는지에 대해서 얘기한 적은 거의 없었거든요. 이번 기회에 책장을 쭉 둘러보며 열심히 책을 읽던 시절의 기억도 떠오르고 감동에 젖어 읽었던 책들을 다시 발견하는 재미를 찾았어요.

책을 많이 읽는다고 들었어요.
예전엔 정말 많이 읽었는데, 이젠 눈도 아프고 대본을 봐야 하는 일이 많으니 이전처럼 자주 읽진 못해요. 그래도 늘 활자를 곁에 두려고 하죠. 우리 세대는 종이에 인쇄된 활자에 익숙하잖아요. 매일 아침 하루 일과를 신문 보는 걸로 시작하고 그걸 거르면 뭔가 찜찜하고 이상해요. 그래서 해외 출장을 갈 때면 그간 못 읽고 모아둔 신문 다발을 싸 들고 가요.

책벌레였나요? 학창 시절에 읽은 책이 연기에 많은 자양분이 되지 않았을까 짐작하는데요.
아니 전혀요. 전 워낙 활동적이라 나가 노는 걸 좋아했어요. 책벌레의 느낌은 아니었지만 감성이 풍부했죠. 그래서 책을 읽는 것도 좋아하는 정도였죠. 어렸을 때부터 읽었던 책이 워낙 많고 또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잘 나진 않지만 아마 제가 연기의 길로 가게 된 데 기여했을 거예요.

오늘날 할리우드 영화계를 주름잡는 명배우들을 배출한 런던극예술학교에서 연기를 공부했는데, 그곳에서 보냈던 시간도 궁금해요. 찰스 디킨스, 버지니아 울프 등 영국 작가들의 작품에 심취했나요?
20대 때 영국에 있었던 덕분에 클래식에 익숙해요. 저도 모르게 고급문화에 많이 노출됐었죠. 그림, 문학, 연극, 클래식 음악 등. 특별한 건 없는데 어렸을 때 문화생활을 풍족하게 했기에 문화적인 요소가 충족되지 않으면 갈증이 나요. 그런 걸 지향해서가 아니라 습관이 돼서 그런 거죠. 셰익스피어는 교과서라서 영어로 연극을 했으니 말할 것도 없고, 셰익스피어가 있기 전 14세기 제프리 초서부터 시작된 영국 문학은 정말 풍요롭잖아요. 근데 전 소설보다는 대부분 희곡을 많이 읽었어요. <생일파티>(1958)를 비롯한 해럴드 핀터 Harold Pinter의 희곡들, 데이비드 헤어 David Hare의 <프렌티>(1985), <웨더비>(1985) 같은. 80년대 그들은 정말 최고였어요. 당시 해럴드 핀터는 아방가르드하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이후 새로움을 찾는 극작가들이 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런던에 있을 때 항상 핀터의 연극이 극장에 걸려 있었죠. 또 알렌 에이크번 Alan Ayckbourn과 남성 중심 연극계에서 명성을 얻었던 캐롤 처칠 Caryl Churchill의 작품도 많이 봤고요.

캐롤 처칠의 작품이 궁금해지는데요. 국내엔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잖아요.
그녀는 이름을 Carol에서 여성적인 느낌을 없애려고 Caryl로 바꾼 작가예요. 당시 보수적인 영국 연극계에서 성 역할에서의 부조리를 해체하고자 하는 고민에서 나온 작품들을 선보였는데, 그럼에도 성공적으로 인기를 얻었다는 게 대단하죠. 대표작으로는 <클라우드 나인>(1979), <최고의 여성들>(1982), <습지>(1983) 같은 것들이 있어요.

꼭 그 학교를 가고 싶다는 이유가 있었나요?
그런 건 없었어요. 그냥 떠나고 싶었죠. 80년대 한국은 문화적으로 척박했잖아요. 경제적으로도 비루한 시기였고. 다니던 학교 동아리에서 연극을 시작했다가 런던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한 거죠.

드라마, 영화, 연극 등 정말 많은 작품을 했는데, 배역을 맡아 연기한 작품 중 사람들이 꼭 읽었으면 하는 책이 있으세요?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요. 워낙 유명한 고전이지만 대부분 입시 준비할 때 이 책을 접하고 “뭐야?” 하고 접어버린 분들이 많을 거예요. 그 나이대에 이해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니까. 전 30대 초반에 이 작품으로 연극을 하게 되어 읽었어요. 그루센카 역을 맡아 동숭아트홀에서 공연했는데, 그때 읽었을 때 받은 인상은 충격이었죠. 인생을 어느 정도 살아보지 못하면 이해가 안 되거든요. ‘아, 이게 정말 문학이구나’라고 느꼈어요. 그래서 후배들에게도 항상 고전을 읽으라고 해요. 고전을 통해서 받은 감동은 가슴속에 영원히 남는 것 같아요. 살면서 그걸 연료처럼 사용하는 거죠.

THE HOURS BEFORE DAWN
왼쪽부터 처음부터 끝까지 이메일 대화로 이루어진 다니엘 글라타우어의 로맨스 소설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아프가니스탄의 참상을 절절한 문체로 기록한 할레드 호세이니의 소설 <그리고 산이 울렸다>, 정경순이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고전으로 꼽은 도스토옙스키의 명작 <카라마조프의 형제>.

들고 오신 책을 보면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독서를 하는 것 같아요. 미당 서정주의 <화사집>부터 동시대 에세이, 로맨스 소설도 있어요.
기술적으로 잘 다듬어진 것보다는 진심이 느껴지는 글을 좋아하죠. 이남호 씨가 쓴 <남김의 미학>은 최근에 읽은 책이에요. 제목은 좀 진부하나 한국 미학을 제대로 해부한 책이라고 생각해요. 모든 한국적인 아름다움이 남김에서 온다는 걸 테마로 건축, 그림, 음악, 문학 등 전방위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정말 재미있게 썼더라고요. 사랑도 일도 그런 것 같아요. 너무 다 퍼줘서 번아웃 Burn Out하지 말고 조금 남겨두자. 조금씩 절제하고 남겨두자. 책을 읽는 게 배우가 되는 가장 큰 자양분이 되는 건 분명해요. 근데 배우가 사실은 책을 너무 읽어도 안 되는 것 같아요. 좀 비어 있을 필요가 있거든요. 배우에게도 남김의 미학이 필요한 거죠. 배우의 작업이란 혼자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팀워크거든요. 자신만 잘났다고 되는 게 아니라 자신을 비우고 캐릭터에 빙의하는 게 중요한 거죠.

시도 좋아하세요?
서정주를 너무 좋아해요. 좋아하는 사람들, 연극배우들이 모여 1년에 한 번씩 서정주 시 낭송회도 해요. 친한 언니가 서정주 시인 제자였기도 해서 좋은 책을 많이 알려줘요. 오늘은 <화사집>을 가져왔는데, 서정주 시인의 산문이 정말 좋아요. 지난해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지금껏 발견된 서정주의 시와 산문을 모두 그러모아 20권 분량의 전집을 냈거든요. 그중에 연대별로 정리된 산문이 4권 있어요. 1970~80년대에 세상을 바라보는 문학인의 시선이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꼭 TV 드라마 보는 것처럼 우리 어렸을 때 사는 이야기들이니까.

최근 제일 빠져들어 읽은 책인가요?
요즘은 성경을 읽으면서 다른 책을 덜 보게 됐는데 성경엔 진리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성경을 보다 보면 다른 소설이 좀 거짓말 같아 보이는 거지. 너무 영적인 이야기니까 뭔가 내 속에서부터 차오르는 충만함을 느낄 수 있거든요. 샘솟듯이. 근데 이 인터뷰를 계기로 다시 책을 보면서 재미를 찾았어요.(웃음) 제가 사는 아파트 단지 내 도서관이 있는데, 좋은 책이 참 많아요. 저도 책을 많이 기부했고. 이곳에 사는 동안 여기 있는 책을 다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국내 소설 중에는 성석제 소설집과 구병모의 <위저드 베이커리>를 꼽아주셨네요.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는 성석제의 이야기꾼으로서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주는 단편집이라고 생각해요. 각 단편이 다 짠하고 마음이 쓰이는데 위트와 해학으로 술술 읽히게 풀었죠. 성석제 작가를 모르는 분들은 김영하 작가의 구세대 버전 느낌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아요. <위저드 베이커리>는 창비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한 소설이라 많이들 읽어보셨을 거예요. 저도 너무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나요. 시인 김동환과 소설가 최정희 부부의 두 따님도 소설가였는데. 김지원, 김채원 두 분이 함께 집필한 이른바 자매 소설집 <먼 집 먼 바다>도 참 잘 읽었어요.

서사가 있어 명확한 전개가 이뤄지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거 같아요. 아프가니스탄 작가 할레드 호세이니와는 특별한 인연이 있다고요?
할레드 호세이니는 각별하죠. 에서 그의 책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을 소개한 적도 있고요. 몇 년 전 퀴즈쇼 프로그램에 나간 적이 있는데 상금 1000만원이 걸린 마지막 문제의 답이 할레드 호세이니였어요. 다들 못 맞힐 거라 생각했는지 제가 바로 정답을 말하자 사회자 전현무 씨를 비롯해 스태프들도 놀란 눈치였죠. 결국 저희 팀이 상금을 탔고요. 당시만 해도 할레드 호세이니가 국내에서 널리 읽히는 작가가 아니던 때였죠. 그의 첫 책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지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여성들의 얘기인데 충격받은 작품이었어요. 개인적으론 <그리고 산이 울렸다>를 더 좋아하는데 전쟁과 난민 속에서 벌어지는 가족의 비극을 담담하게 얘기하는 책이죠. 너무 감동을 받아서 영문판으로도 샀어요.

전 <현대문학> 주간과도 그 책을 계기로 알고 지내는 거예요?
아뇨, 전부터 친해서 <현대문학>도 보내주고 좋은 책을 많이 알려줬죠. 일본 추리소설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 책도 보내줘서 읽었는데 그런 건 무서워서 잠을 못 자겠더라고요.

이렇게 읽은 책들 중에서 꼭 한번 연기해보고 싶은 캐릭터가 있나요?
너무 많은데, 볼 때마다 다 하고 싶어요. 예전에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서 한 가수가 제게 그러는 거예요. “팬이에요. 전 누나가 한국의 메릴 스트립이라고 생각해요.” 그 말이 고맙더라고요. 우리 세대는 메릴 스트립, 수전 서랜든이 로망이었잖아요. 지금은 그 계보를 케이트 블란쳇이 잇고 있다고 볼 수 있고요. 사람들이 이름만으로 믿고 보는 그런 배우가 되고 싶죠.

WRITER이다영

PHOTO이재안

2018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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