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TRAVEL / ART
Jul 12, 2018

아름다운 글

필립로스가 화가 필립 거스턴에 관해 쓴 아름다운 글.

아름다운 글

SMOKING I
1973, OIL ON CANVAS, 134×137.2cm / 52 3/4×54in PHOTO: GENEVIEVE HANSON, © THE ESTATE OF PHILIP GUSTON COURTESY THE ESTATE AND HAUSER & WIRTH

필립 거스턴의 딸이자 필립 거스턴 에스테이트 Philip Guston Estate의 상속자인 무사 메이어 Musa Mayer의 책 <나이트 스튜디오 Night Studio>(1998)에 따르면 1948년과 1956년 사이 필립 거스턴이 판매한 그림은 단 두 점에 불과하다. 1955년 그는 윌렘 드 쿠닝, 마크 로스코, 프란츠 클라인 등 후에 추상표현주의 Abstract Expressionism 혹은 뉴욕 스쿨 The New York School이라 불리는 일군의 화가들이 속해 있는 시드니 재니스 갤러리 Sidney Janis Galley와 전속 계약을 맺는데 이 계약은 필립 거스턴에게 어느 정도의 재정적인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화가로서 작품에 몰두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계기가 마련된 셈이다.
<더 뉴요커 The New Yorker>의 미술 비평 주간이었던 해럴드 로젠버그 Harold Rosenberg는 50년대의 회화, 특히 뉴욕을 중심으로 전개된 일련의 회화 운동의 본질을 당대의 비평가들과 구별되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다. 그는 이러한 회화를 ‘거꾸로 뒤집어’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며 그림이 표면이 아닌 회화가 제작되는 과정, 그리고 이 과정에서 화가들이 공유하는 어떤 특정한 지점을 이해해야 한다고 적었다. ‘특정한 순간 At a certain moment’. 그는 1952년 게재한 글에서 이 ‘특정한 순간’을 강조한다. “오늘날 미국 화가들에게 캔버스는 과거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캔버스는 이들에게 ‘행동 Act’을 위한 장소이다. 그것은 무언가를 생산하거나 재배열하거나 분석하거나 표현하거나 대상을 재현하거나, 상상을 시각화하는 그런 행위와는 전혀 무관하다. 따라서 그들의 캔버스가 시각화하고 있는 것은 그림이 아니라 사건, 사건 그 자체이다.” 1956년 MoMA Museum of Modern Art에서 발간한 <12 Americans>에서 거스턴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통 제 작업은 매우 지루합니다. 제멋대로 움직이던 무분별한 공기가 사라지고 물감이 원래 있어야 할 곳에 자리할 때까지 기다리는 겁니다. 그 순간까지 그저 기다려야만 하는 거죠.”

아름다운 글
THE POET
1975 OIL ON CANVAS 175.3×188cm / 69×74in PHOTO: GENEVIEVE HANSON © THE ESTATE OF PHILIP GUSTON COURTESY THE ESTATE AND HAUSER & WIRTH

거스턴이 추상회화 제작에 몰두하던 시기, 그는 추상표현주의보다는 뉴욕 스쿨이라는 수사를 선호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그는 뉴욕 스쿨이라는 수사조차도 썩 마음에 들어 하지는 않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는 모두의 전시를 보러 다녔습니다. 바넷 뉴먼과 마크 로스코, 프란츠 클라인과 나, 그리고 드 쿠닝이 특히 그랬죠. 당시 우리들은 모두 다른 방식으로, 각자 개별적인 방식으로 작업했습니다. 전시는 우리들의 ‘다름 Differences’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던 셈이죠. 한편 사람들은 뉴욕 스쿨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마치 그런 어떤 특정한 집단이 있었던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우리는 모두 각기 다른 사람들이었고 다른 화가들이었습니다. 모두 각자의 ‘다름’이 있었죠.”
1962년 구겐하임 뮤지엄은 필립 거스턴의 대대적인 회고전을 개최하는데 그해 거스턴과 로스코, 그리고 드 쿠닝은 재니스 갤러리와 계약을 파기한다. 그들의 집단행동은 갤러리가 대형 팝아트 전시를 개최한 데 대한 일종의 항의 표시이기도 했다. 1966년 거스턴은 유대인 뮤지엄 Jewish Museum에서 개인전을 개최한다. 당시 <뉴욕 타임스>에 게재된 힐튼 크레이머 Hilton Kramer의 비평은 거스턴의 그림을 원색적으로 폄훼한다. 그는 거스턴의 그림이 ‘제한된 문법’을 무의미하게 ‘반복적’으로 사용할 뿐이며 그의 그림이 ‘고상한 척하는 따분한 것’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크레이머는 미술 비평을 정치적 활동을 위한 플랫폼으로 이해하는 일종의 우익 인사였는데 그러한 연유로 훗날 <뉴욕 타임스>에서 해임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해임되기 전까지 거스턴과의 악연은 계속 이어진다.
유대인 뮤지엄에서 개인전이 열린 1996년 필립 거스턴은 뉴욕의 아파트와 작업실을 완전히 정리하고 우드스톡 Woodstock에 정착한다. 그리고 우드스톡에 정착한 시기부터 거스턴의 화풍은 미묘하게 변하기 시작한다. 주류 미술계에서 제도적인 인가를 받은 후 밀려오는 예술가 특유의 공허함이 변화의 이유일 수도 있겠지만 크레이머의 신랄한 비평과 그에 따른 후폭풍도 거스턴의 작품 세계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는 크레이머의 비평에서 어린 시절 그를 추격해오던 KKK 단원의 모습을 연상했을 것이다. 거스턴은 적들의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길 원했고 벽장에 숨어 전구 빛에 의지한 채 그림을 그리던 어린 시절처럼, 적들의 시선으로부터 사라지길 원했다. 뉴욕과 미술계의 주류 비평은 벽장 밖의 세계였고 한적한 시골 마을 우드스톡은 그의 새로운 벽장이요 전구의 불빛이었던 셈이다. 우드스톡에 정착한 거스턴의 화풍은 좀 더 ‘회화적 Painterly’으로 변모하는데 이를테면 이 시기 거스턴의 추상회화는 구도적인 측면에서 좀 더 중앙으로 집중되고 색조는 더욱 단순화되어 제한된 팔레트로 구현된다. 구도는 중앙으로 집중하다 못해 그림의 테두리, 그러니까 프레임에 인접한 사면은 아예 비워지는 경우도 생긴다. 그림이 캔버스 안쪽으로 축소되는 경우 그림은 마치 그림 속의 그림, 액자 속의 액자처럼 전혀 다른 층위의 서사를 구축하는 효과를 자아내는데 이 시기 거스턴의 작품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다운 글
UNTITLED
1969 ACRYLIC ON PANEL 45.7×50.8cm / 18×20in © THE ESTATE OF PHILIP GUSTON COURTESY THE ESTATE AND HAUSER & WIRTH

한편 필립 거스턴의 작품 세계는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1930년대부터 40년대 초기까지 거스턴은 주로 벽화 작업에 몰두하며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르네상스 회화의 영향을 반영한 사실적이고 유려한 구상 회화에 몰두했다. 1934년, 거스턴은 그의 동료이자 후에 그의 사돈이 된 루벤 캐디시 Reuben Kadish와 함께 멕시코 여행을 떠난다. 그들은 멕시코 모렐리아 Morelia 주에서 막시밀리안 1세의 Emperor Maximilian I의 요양 시설로 쓰인 궁에 걸릴 약 93㎡ 크기의 벽화를 의뢰받는다. ‘전쟁과 파시즘과의 투쟁 The Struggle Against War and Fascism’(1934)이라는 제목의 이 거대한 벽화는 멕시코의 민중 화가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 David Alfaro Siqueiros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타임 Time> 매거진은 이와 관련한 기사를 게재하기도 했다. 이 기사는 시케이로스와의 대화를 인용하고 있는데, 여기서 시케이로스는 거스턴을 ‘미국에서 가장 전도유망한 화가 중 한 사람’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거스턴은 멕시코 체류 기간 동안 프리다 칼로 Frida Kahlo, 디에고 리베라 Diego Rivera 등과 만나 교류하기도 했다. 멕시코에서 돌아온 거스턴은 22세에 뉴욕으로 이주해 공공사업진흥국 Works Progress Administration 소속의 벽화 작가로 일하며 생계를 이어나간다. 1930년대 중반부터 40년대 초반까지 거스턴이 그린 벽화를 보면 그가 동경했던 르네상스의 대가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Piero della Francesca, 파올로 우첼로 Paolo Uccello, 마사초 Masaccio, 지오토 Giotto의 영향을 발견할 수 있다. 당시 거스턴은 낮에는 벽화공으로 일하고 밤에는 뉴욕의 술집에서 젊은 화가들과 교류하며 새로운 화풍을 전개해나간다. 그가 술집에서 어울렸던 일련의 젊은이들은 후에 추상표현주의 혹은 뉴욕 스쿨 아티스트로 분류된다.
1940년대 초부터 60년대 후반까지, 거스턴은 추상회화 제작에 몰두했다. 1941년 거스턴은 아이오와 대학교의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뉴욕을 떠난다. 잭슨 폴록 Jackson Pollock 등 뉴욕 스쿨의 화가들은 거스턴의 이탈을 염려했지만 이미 결혼을 하고 슬하에 딸이 있었던 거스턴에게 스튜디오와 강의 자리를 제공하는 아이오와 대학교의 제안은 거부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아이오와에서 1945년까지 머문다. 1950년대에 이르면서 거스턴은 1세대 추상표현주의 화가 또는 뉴욕 스쿨의 일원으로 주목받기 시작한다. 시드니 재니스 갤러리와 전속 계약을 맺은 것도, 작가로서 평판을 다지며 화풍의 토대를 마련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거스턴은 이 시기를 통해 무엇보다 이후, 획기적이고도 드라마틱한 전환을 통해 한 번에 날려버릴 수 있는 작가 자신의 유산, 미적 성취를 이룬 시기이기도 하다.
구겐하임 뮤지엄과 유대인 뮤지엄에서의 개인전 이후, 1966년부터 1967년까지 거스턴은 붓을 들지 않고 잠적해 긴 암흑기를 보내는데 이 시기 그에게 주요하게 다가왔던 것은 유대인으로서 작가 자신의 정체성과 회화적 숭고 Sublime에 대한 괴리감이었다. 뉴욕 스쿨의 일원이었던 마크 로스코는 거스턴과 같은 러시아 이민자의 후예이자 유대계였는데 회화적 숭고를 추구했던 로스코와 달리 거스턴은 자신의 회화가 숭고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자신이 영원한 곳으로부터 한없이 멀어지려고 했던 로스코와는 달리 거스턴은 자신의 근원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했으나 그런 행위를 반복할수록 외려 자신이 피하려 했던 진실과 마주했다. 거스턴의 원래 이름은 Pillip Goldstein이었는데 같은 고등학교의 1년 선배이자 뉴욕 스쿨의 일원이었던 잭슨 폴록의 충고를 받아들여 거스턴은 이름에서 L자 하나를 덜어내고 근원을 전혀 알 수 없는 거스턴 Guston을 자신의 새로운 성 姓으로 받아들인다. 폴록은 그에게 그의 성이 유대인의 뉘앙스를 풍긴다며 예술가로 성공하고 싶다면 성을 바꿀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그의 충고를 받아들여 성을 바꾼 일은 거스턴에게 지울 수 없는 과오, 일종의 트라우마로 남게 되며 이러한 죄의식과 스스로에게 가하는 형벌, 비난은 거스턴의 후기 작품을 포괄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모든 것에 거리감을 부여하는 극단적인 신성과 영적 체험을 추구했던 로스코식의 유대인 신비주의는 거스턴에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한편 거스턴이 우드스톡에 잠적하던 시기 그는 아이작 바벨 Isaac Babel의 글을 탐독하며 새로운 가능성에 눈을 뜬다. 바벨은 그의 부모님과 동향인 오데사 Odessa 출신의 유대인 저술가로 1905년 유대인 대학살을 목격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바벨의 글은 ‘유년 시절의 기억’에 근거해 ‘단순한 요소’로 구축되어 있어 거스턴을 매료시켰다. 바벨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사소하고 작은 일화들, 시장통의 가십을 가지고 나 자신과 분리될 수 없는 어떤 것(이야기)으로 만든다. 이는 살아 있고, 스스로 변주한다. 해변의 조약돌처럼 둥글고, 그 결함은 너무 강해서 번개로도 쪼갤 수가 없다.” 한편 1966년부터 1967년까지 거스턴은 스스로가 ‘퓨어 드로잉 Pure Drawing’이라 명명한 드로잉 연작을 제작한다. 그림의 백색 표면에 흑연과 잉크로 ‘단순한 요소’를 그려 넣은 이 일련의 연작은 이후 구상 회화로 돌아서는 거스턴에게 매우 중요한 단초를 제시한다. 결국 단순한 진실을 이야기하기 위해선 보이는 것을 보이는 대로 그려야 했던 것이다.

아름다운 글
ABOVE AND BELOW
1975 OIL ON CANVAS 170.8×184.8cm / 67 1/4×72 3/4in PHOTO: MATTHEW KROENING © THE ESTATE OF PHILIP GUSTON COURTESY THE ESTATE AND HAUSER & WIRTH

70년대 뉴욕의 화단은 대대적인 격변기를 맞는다. 추상표현주의와 액션 페인팅에 이어 ‘색면 추상 Color Field Painting’과 ‘하드 에지 페인팅 Hard Edge Painting’ 등의 새로운 사조가 등장했으며 모리스 루이스 Morris Rouis, 프랭크 스텔라 Frank Stella, 엘즈워스 켈리 Ellsworth Kelly 등이 새로운 세대의 주역으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해럴드 로젠버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바넷 뉴먼이 문을 걸어 잠그자 로스코가 그림자를 드리웠고 레인하르트가 불을 완전히 꺼버렸다. 그리고 아무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1962년 시드니 재니스 갤러리와 계약을 파기한 거스턴은 1966년 로스코 등과 함께 말버러 갤러리 Marlborough Gallery의 전속으로 새로운 전시를 준비하고 1970년 새로운 구상 회화 33점을 발표한다. 전시가 공개되자 거스턴의 지인들은 그에게 달려와 이렇게 외쳤다. “무슨 일이야? 대체 무슨 연유로 자신이 성취한 것들을 파괴하려고 하는 거지?” 대다수의 사람들은 거스턴의 전환은 ‘이단 Heresy’이라고 간주했지만 드 쿠닝만은 달랐다. 그는 사람들이 ‘이단’이라 칭한 것을 ‘자유’라 불렀다. 드 쿠닝은 거스턴에게 이렇게 말했다. “축하하네. 자네는 이제 빚을 다 갚은 셈이야.”
드 쿠닝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거스턴은 평단의 무자비한 혹평에 시달렸다. <뉴욕 타임스>의 힐튼 크레이머가 다시 선봉에 섰다. 그는 거스턴을 ‘낙오자 행세를 하는 고위 관료 A Mandarin Pretending to be a Stumblebum’(1970)라고 칭하며 이렇게 적었다. “노년기에 이른 거스턴은 마침내 우리를 그의 새로운 스타일, 만화 같은, 펑키하고, 어색하며, 어딘지 일반적인 느낌의 새로운 취향을 강요한다. 이 전시에서 거스턴은 우리에게 ‘도시의 원시인’이 될 것을 요구한다. 그의 새로운 페르소나를 그저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요구는 해도 너무한 것이다. 레드 그룸스 Red Grooms나 클라스 올든버그 Claes Oldenburg의 예를 참조하지 않더라도 거스턴이 ‘뒤뷔페 Dubuffet 되기’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자명해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매우 진부한 것으로 심지어 뒤뷔페 자신도 이미 그것이 너무 늦어버렸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을 정도다. 고위 관료의 취약한 감성은 그 스스로를 까막눈 낙오자의 서정으로 위장하려 하지만 이 장면은 너무나 작위적이어서 정작 그 자신을 제외하곤 모두가 눈치챌 수 있을 정도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당대의 현실과 유리된 채 스스로를 격리시켜온 이 불쌍한 예술가는 자신의 그와 같은 행위가 여전히 ‘행위’의 일종으로 인식되길 바라는, 부질없는 희망을 품고 있다.” 크레이머의 혹평 때문이었을까. 판매되지 않은 그림은 다시 스튜디오로 돌아왔고, 격리된 화가는 외로운 싸움을 다시 시작해야 했다.
세간의 융단폭격을 받고 정신적으로 황폐화된 거스턴에게도 좋은 일은 있었다. 같은 유대계 미국인이자 비슷한 이유로 비판을 받고 뉴욕에서 쫓겨나다시피 우드스톡으로 이주해온 소설가 필립 로스 Philip Roth를 만난 일이다. 그들은 유대계 미국인이자, 주류 평론가 집단의 가혹한 비평의 희생양이 된 점, 그리고 무자비할 정도로 솔직한 자기 탐구로 인해 스스로 피해자가 된 공통의 경험을 공유했다. 필립 로스의 <포트노이 씨의 불만 Portnoy’s Complaint>(1969)은 출간되자마자 엄청난 스캔들을 일으켰는데 무엇보다 당시로선 상당히 노골적인 성 행위 묘사가 논란의 주된 원인이었다. 로스는 변태적인 인물로 낙인찍혔고 이러한 세간의 시선은 도를 넘어 로스의 사생활을 침범했으며 결국 맨해튼을 떠나야만 했다

아름다운 글
1951, PHILIP GUSTON IN HIS NEW YORK CITY STUDIO, CA. COURTESY THE ESTATE AND HAUSER & WIRTH

필립 로스는 우드스톡에서의 삶을 이렇게 술회했다. “성도착자로 낙인찍힌 나의 평판은 유방에 관한 어떤 환상으로 이어졌다. 그러니까 어떤 대학교수가 있고 성도착자인 그는 마침내 여성의 유방으로 변신한다는, 그런 내용의 판타지였다. 이 판타지는 안락한 미국에서 소외된 노숙자의 삶의 경로가 그 자체로 미국의 위대한 문학이 될 수 있다는, 일종의 망상과도 연관이 있었다. 우드스톡의 삶이 더 편안해질수록 나의 내면에 자리 잡은 이러한 잔혹극에 대한 집착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로스는 유대계 미국인 예술가였지만 로스코와는 정반대였다. 그는 자신의 트라우마에 집착했으며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스스로의 손으로 그것을 처리하는 방식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고자 했는데, 이는 거스턴의 입장과 일치했다. “<유방 The Breast>(1972)이 출간된 직후 그 책을 읽은 거스턴은 내게 평범한 타이핑 용지에 그려진 일러스트레이션을 보여줬다. 나는 그와 저녁 식사 중이었고 거스턴의 그림은 소설의 내용 일부를 그린 것이었다. 몇 년 전 내가 <우리 패거리 Our Gang>(1971)를 쓰고 있을 때 나는, 초고의 일부를 거스턴에게 보여주었고 그는 리처드 닉슨 Richard Nixon과 헨리 키신저 Henry Kissinger, 스피로 애그뉴 Spiro Agnew와 존 미첼 John Mitchell의 캐리커처로 화답했다. 그는 이 캐릭터들에 더욱 심혈을 기울였고 점점 더 완성도를 높였다. 그는 심지어 <딱한 리처드 Poor Richad>라는 제목의 동화책을 출간한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내 작품 <유방>에서 비롯된 거스턴의 드로잉 8점은 오로지 거스턴이 자발적으로 그린 것이었고 이 작품들은 그가 오로지 나를 위해서,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해 그린 것들이었다.”
한편 말버러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이후로도 거스턴의 그림은 전혀 팔리지 않았고 결국 거스턴은 1972년 갤러리를 떠난다. 그 와중에 말버러 갤러리는 로스코 스캔들에 휘말려 디렉터인 프랭크 로이드 Frank Lloyd가 사임하고 그의 스태프 중 한 사람이었던 데이비드 매키 David McKee도 말버러 갤러리에서 나와 자신의 이름을 건 갤러리를 연다. 1974년 그는 거스턴을 찾아와 함께 일할 것을 제안하는데 그의 설득에 감화된 거스턴은 갤러리와 계약을 맺는다. 이후 데이비드 매키 갤러리는 거스턴을 끈기 있게 후원한다. 거스턴의 개인전을 다섯 번에 걸쳐 진행하는 동안에도 판매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매키의 확신에는 변함이 없었고 두 사람의 신뢰는 굳건했다.
1978년 로스앤젤레스의 컬렉터 에드워드 브로이다 Edward Broida가 거스턴의 작품을 대량으로 수집한다. 1979년 거스턴은 첫 번째 심장 발작으로 쓰러진다. 그리고 1980년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은 필립 거스턴의 대규모 개인전을 개최한다. 전시가 시작된 지 3주 후 거스턴은 두 번째 심장 발작으로 사망한다. 70년대 혹독했던 거스턴에 관한 평가는 80년대에 이르러 ‘신표현주의 Neo-Expressionism’의 기수, 선구자로 재평가받게 된다. 한편 2016년 필립 거스턴을 41년간 대변해온 데이비드 매키 갤러리는 문을 닫고 일체의 권한을 하우저 앤 워스 Hauser & Wirth 갤러리로 넘긴다. 하우저 앤 워스 갤러리는 2017년 거스턴이 필립 로스와 나눈 우정의 산물인 <딱한 리처드>(1971-1975)를 포함하는 전시 <Philip Guston Laughter in the Dark, Drawings from 1971 & 1975>(2017)를 소개했으며 2018년 새로 문을 연 하우저 앤 워스 홍콩에선 현재 거스턴의 작품 세계를 조망하는 전시 <Philip Guston. A Painter’s Forms, 1950–1979>(2018)가 진행되고 있다.
얼마 전 타계한 필립 로스가 남긴 아름다운 글 <Philip Guston>(1970)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작가가 스스로에게 느끼는 비참함을 자기 풍자로 전환시키는 거스턴의 선호(고골 Gogol이 <광인의 일기 Diary of a Madman> 그리고 <코 Nose>에서 자기 연민과 낭만을 제거하기 위해 취했던 전략과 동일한)는 자신의 지독한 중독과 슬픈 이야기가 위스키 병과 담배꽁초로 표현되고 우울한 불면증이 서사적인 만화로 등장하는 그의 그림처럼 우리에게 강렬한 이미지를 선사한다. 그는 단지 우리를 농락하려고 했을지도 모르지만 그가 농락하려고 했던 것은 그가 스튜디오에서 설정했던 회화적 목표이기도 하다. 그 목표는 그가 화가로서, 자신의 과거를 극복하는 동시에 그것을 그림으로 그려나가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그는 어떤 수사학적 연계도 거부했고 인간으로서 그가 느끼는 절망감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자 했다. 그리고 우연히도 1980년 66세의 나이로 타계한 필립 거스턴은 최후의 순간 자신의 모습을, 어떤 참을 수 없는 변형을 견뎌내고 있는 기괴한 형상으로 포착해내고 있다. 생각에 골몰해 있는 것이 아닌, 훼손된 생식샘 그러나 부풀어 오르고 있는, 애꾸눈의, 마치 야수와도 같은 거대한 머리. 마침내 그것은 스스로를 섹스의 몸으로부터 구출해내고 있다.”

WRITER유병서

20187월호

본 기사를 블로그, 개인 홈페이지 등에 출처를 밝히지 않거나
기사를 재편집하여 올릴경우, 이에 따른 불이익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