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YLE / CONVERSATION
Feb 12, 2018

그녀에겐 특별한 것이 있다

스타일리스트 한혜연과 나눈, 결코 가볍지 않은 만만한 이야기.

그녀에겐 특별한 것이 있다

자칭 타칭 ‘슈.스.스(슈퍼스타 스타일리스트)’라 불리는 한혜연은 한국의 대표적인 스타일리스트다. 이효리, 공효진, 임수정, 송혜교, 소지섭, 김태희 등 그간 그녀의 손길을 거친 톱스타들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커리어는 충분히 설명되겠지만, 한혜연에겐 그보다 더 특별한 것이 있다. 대한민국 패션계에서 20년 넘게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지켜온 특유의 근성과 성실함이라든지, 그저 그런 클리셰가 아닌, 실용적인 스타일링 팁의 자양분이 되어준 날 선 감각과 유려한 말솜씨, 시청자를 울리고 웃기는 ‘예능 블루칩’으로서 타고난 순발력과 솔직함은 ‘인생 뭐 있냐’는 태도로 일관하는 그녀의 삶에 아주 많은 것을 안겨주었다. 사실 한혜연이라는 사람의 진가는 직접 대화를 나눠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스타일리스트라는 직함에는 왠지 모를 도도함과 까다로움이 묻어 있고, 눈꼬리를 따라 그린 강렬한 아이라인은 그녀를 그저 ‘센 언니’로 포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와 마주 앉아 눈을 마주치는 순간, 예상치 못한 매력이 불쑥 치고 들어온다. 호기심 어린 눈빛과 장난기로 굼질대는 입매는 무표정한 얼굴에 종종 뜻밖의 발랄함을 불어넣고, 거침없는 언변에는 대화를 매끄럽게 이어가려는 배려와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 곳곳에 숨어 있다. 그런 그녀와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에겐 특별한 것이 있다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요즘에? 그냥 바쁘지 뭐. 잘돼서.(웃음)

부쩍 예능 프로그램 출연이 잦아졌어요.
예전에도 패션 관련 채널에서 고정으로 출연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요즘은 더 다양한 방식의 방송을 하게 됐죠. 요즘 하는 것 중에는 내가 원하는 것도 있지만 회사에서 필요로 하는 것도 있어요.

맞다. 에스팀과 계약했죠? 소속사가 생겨서 달라진 점이 있을까요?
그냥 똑같아요. 늘 하던 건데 그냥 콘텐츠가 달라졌죠. 그리고 원래는 주로 잡지를 통해서 커리어를 쌓고, 잘난 척도 하고 그랬는데, 요즘은 미디어의 범위가 넓어졌잖아요. 그러다 보니 PR 아닌 PR을 이런 식으로 하는 것 같아요. 나는 앞으로도 스타일리스트로 계속 일할 거고, 이 직업을 사람들이 많이 알수록 공감대도 얻을 수 있으니까 포커싱을 그쪽으로 돌린 거죠.

사람들이 나를 많이 알고 이해해줄수록 내 본업에 더 도움이 된다는 거죠?
그렇죠. 그런데 이해를 바라는 건 아니고 일단 많이 알려야 되니까. 그런 거 있잖아요. 아제딘 알라이아가 죽었는데, 우리는 막 너무 슬픈데, 솔직히 관심 없는 사람들한테는 ‘그게 뭐 어때서?’ 싶잖아요. 그런 측면에서 우리 산업을 많이 알리면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그러면 공감대도 형성이 되니까.

패션계 전반에 대한 애정이 대단한 것 같아요.
이 바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지 않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실장님도, 방송이니 뭐니 다른 활동을 많이 하지만 ‘그래도 나는 끝까지 스타일리스트로 남겠다’라는 생각인 거죠?
그렇지. 나의 직업은 처음부터 끝까지 스타일리스트예요. 그럴 때 너무 명확하지 않아요? 공항에 입국할 때, ‘직업’란에 쓰잖아요. 그때 나는 너무 스타일리스트인 거지! 엔터테이너도, 인플루언서도 아니고. 그런데 사람들이 자꾸 날 웃기는 사람으로 알아요. 내가 무슨 일 하는지를 잘 모르니까. 어떨 때는 날 보고 스타일리스트 한혜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니까요! 그래도 뭐… 어쩔 수 없지. 더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연관 검색어를 보면 ‘한혜연 결혼’, ‘한혜연 나이’, 이런 식으로 사생활에 자꾸 포커스가 맞춰져요. 그런 것에 대한 불편함은 없으세요? 사실 패션 업계 사람들은 좀 폐쇄적인 부류잖아요.
파고들어도 나올 게 없으니까 상관은 없어요. 제가 음성적으로 노는 스타일은 아니라서 숨길 게 별로 없거든요. 술도 아예 안 마시니까 사고를 칠 일도 없고. 그냥 행동을 조금 조심하게 되긴 하는 것 같아요.

누구나 일종의 자체 필터링이 필요하죠.
그렇죠. 너무 되바라져 보이긴 싫으니까. 나의 본질은 당당함인데 그게 겉으로 드러날 때는 한 끗 차이로 다르게 전달될 수도 있거든요. 사람들의 판단은 순간적이잖아요. 그런 면에서 약간의 딜레마가 있는 것 같아요. 인생을 연기하듯 사는 재주는 없는 편이라서.

다행히 대중의 반응을 살펴보면 호감 이미지가 지배적인 것 같아요.
웃긴 언니, 재미있는 언니, 그리고 못난 언니. 가끔 그냥 왜 나오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SNS로 라이브 방송 같은 걸 할 때도, 굳이 들어와서 ‘못생겼어’ 이런 댓글 남기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런데 또 나는 그걸 그냥 못 넘긴다? “너 나가.” 바로 얘기하지.(웃음)

사실 방송에서도 보면 ‘삐’ 처리되는 부분이 꽤 있어요.
어머 맞아, 조심해야 돼.

그런데 그런 거침없는 태도에도 불구하고 똑 부러지게 말 잘하는 방송인으로 유명해요. 유창한 언변과 막말 사이에서 줄타기를 굉장히 잘하는 것 같은데, 자신만의 특별한 비법이 있나요?
비법은 따로 없고, 진심 아닌 말은 안 하는 거지. 일을 오래 하다 보니까 그래요. 이건 에디터님도 잘 아실 것 같은데, 우리 패션 업계 사람들은 행사든 일이든 사람들을 만날 때 허투루 하는 말을 너무 많이 듣잖아요. 살쪄서 가뜩이나 기분 나쁜데 “어머. 도대체 뭘 한 거야? 너무 마른 거 아냐?”라고 한마디 던지고 간다든지, 그렇게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들이 싫더라고요. 피곤하고. 자기 할 말만 하고 가는 사람들은 내 에너지를 쪽 빨아먹는 것 같아. 그래서 나는 마음에 없는 말을 웬만하면 안 하려고 해요. 그리고 어차피 내 말에 진심이 담겨 있는지 아닌지는 듣는 사람들이 더 잘 알고 있고.

그렇죠, 거짓은 설득력이 없으니까요.
그럼. 그리고 이제는 연예인이든, 사진가든, 스타일리스트든 이런 진심이 서로 통하는 사람들하고만 끝까지 남게 되는 것 같아요. 방송도 똑같아. 나도 풀세팅하고 예쁘게 보이고 싶죠. 메이크업 다 하고 침대에서 일어난다든지 뭐 그런 식으로. 근데 난 성격적으로 그게 안 되니까 그냥 평소와 같이 하는 거예요. 방송을 한다고 해서 별다른 연기를 하지는 않아요. 나는 그냥 민간인이니까. 내가 뭐라고, 인생 뭐 있어.

드디어 나왔네! 인스타그램에 늘 붙이는 해시태그 #인생뭐있어 가 꽤 인기예요. 이렇게 유행할 줄 아셨어요?
몰랐지. 그냥 내가 늘 하는 말이니까. ‘인생 뭐 있어?’ 근데 친구들이 좋아하더라고요. 그 말을.

저도 좋아해요. 그 한마디면 정말 마법처럼 못할 게 없더라고요.
맞아요. 나도 긍정적인 의미에서 말해요. 우리는 다들 너무 생각을 많이 하잖아. 기우라는 말이 있죠. 전전긍긍하고, 미리 걱정하고. 하지만 사람 앞일은 알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그런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많이 유연해졌어요. 세상을 좀 너그럽게 보고 싶은 마음이 담겨 있다고나 할까. 물론, 늘 마음처럼 되는 건 아니지만. 사촌이 땅 사면 배 아프고, 쟨 뭘 했길래 저리 돈을 많이 벌었나 싶고… .(웃음)

지인들의 얘길 들어보면, 실장님에 대한 평가가 늘 같아요. 유쾌하다, 재미있다, 따뜻하다.
뭐랄까… 일할 때, 굳이 안 그래도 되는데 내가 나서서 분위기를 막 띄우려고 할 때가 있어요. 사실 옷 준비해놓고 필요할 때 입히고 딱 할 일만 해도 되긴 하는데, 결과물이 잘 나오려면 그 이상이 필요할 때가 있거든요. 스태프들도 맨날 하는 촬영이지만 나랑 작업할 때 특별히 더 잘했으면 하는 욕심이 있어요. 그래서 현장 분위기를 좋게 만들고, 그날 모델의 컨디션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거죠. 몸은 지치고 부어 있어도 심정적으로 기분이 좋으면 촬영에 임하는 태도가 달라지니까. 그런 노력을 사람들이 좋아해주는 것 같아요.

그런데 늘 친숙한 사람들하고만 일하는 건 아니잖아요. 처음 작업하는 모델이나 연예인에게는 어떻게 다가가세요?
주로 욕을 하는 편이에요. “어머! XX 너무 예쁘다.” 이런 식으로.(웃음) 내 리액션을 좀 더 극대화하면 상대방이 재미있어 하기도 하고, 또 ‘뭐야~’ 하면서 한순간에 긴장을 조금 내려놓더라고요. 날 잘 모르는 사람한테 ‘내가 어디 가서 뭘 했고…’ 하는 잘난 척보다는 상대방에 대한 칭찬을 재미있고 극적으로 표현하는 게 친숙해지는 데 더 도움이 돼요.

그런데 욕도 재미있게, ‘차지게’ 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 같아요. 혹시 고향이?
서울이에요! 그게 좀 아쉬워. 나는 대식이나 태윤이(메이크업 아티스트 손대식과 박태윤)가 사투리 쓰는 게 너무 재미있거든요. 나도 걔들처럼 지방 출신이면 지금보다 훨씬 더 재미있게 할 자신 있는데!(일동 웃음)

요즘 스케줄이 정말 많잖아요. 방송도 늘어났지만 본업도 워낙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어요. 거기다 협업이나 강의처럼 오랫동안 꾸준히 해온 일들도 있고. 이렇게 본업과 부업을 모두 잘 소화해내는 비결이 있을까요?
그게, 베이스가 하나여서 그런 것 같아요. 나는 스타일리스트니까. 롤 Role을 정확히 정하면 되거든요. 내가 어느 날은 스타일리스트였다가, 또 어떤 날은 가수였다가, 이러면 모든 역할을 완벽하게 하기가 힘들잖아요. 물론 지금도 완벽한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스타일리스트로서, 직접 옷을 입히거나 누군가에게 스타일링 팁을 주고, 또 방송에서 패션 코멘터리를 한다거나, 협업으로 어떠한 스타일의 방향성을 제시한다거나, 그런 모든 것들이 내 원래 롤 안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이에요. 베이스는 하나지만 방식이 다를 뿐이죠.

인상적인 얘기네요. 요즘은 다들 다방면의 멀티플레이어가 되려고 하잖아요.
저는 못하는 건 못한다고 말해요. 저한테 갑자기 인테리어를 하라고 하면 하겠어요? 특히 방송에서 뭐 이것저것 다양한 제안이 들어오거든요. 예전엔 무슨 랩 하는 힙합 프로그램에서도 섭외 전화 온 적이 있어요.

세상에, 랩을 하래요?
아니, 내가 어디 가서 랩을 한 적이 없거든. 뜬금없이 힙합 프로그램에서 섭외가 오니까 좀 당황스럽더라고요. 그런데 기분이 나쁘진 않았어요. 열심히 설명하는 작가한테 막 웃으면서 “나 안 할 건데~” 하니까 그쪽도 막 웃더라고.

하하하! 그래도 유쾌하게 대처하셨네요.
그럼요. 괜히 기분 나쁜 척할 게 뭐 있어요. 발상이 너무 재미있잖아. 내가 랩을 조금이라도 해봤으면 오케이 했을지도 모르지. 아, 내가 요니(스티브 J&요니 P의 디자이너 요니)라면 했을 거예요. 요니는 랩을 잘해. 녹음도 했을걸요?

정말 재미있네요. 지금 이 시점에 그런 프로그램을 하면 화제가 될 것 같긴 해요.
아유 몰라. 별걸 다 시켜.(웃음)

대한민국 패션계에 오래 몸담아왔잖아요. 요즘 업계 전반적으로 너도나도 불황이라고 아우성인데, 사실 이런 볼멘소리가 이젠 좀 지겨울 지경이에요. 실장님이 보는 업계의 현 상황이 어떤지 궁금해요.
다들 시각을 좀 더 넓게 가질 필요가 있다고 봐요. 꼭 하이패션의 한가운데서 폐쇄적으로 머무를 필요는 없거든요. 나도 SNS니 방송이니 뭐니 하면서 계속 쇼오프 Show-off를 하다 보니까 어떤 사람들은 내가 스타일리스트 일을 더 이상 안 하는 줄 알아요. 하지만 나도 주류라고 하는 그 한곳만 바라보다가 지금은 그 밖을 두루 바라보고 일하는 것뿐이고, 사실 그 바깥이 시장은 훨씬 더 크거든요. 사람들의 역할은 달라지지 않을 테니 그냥 좀 더 넓게 봤으면 해요. 불황은 아마 앞으로도 계속될 거고, 그 와중에 살아남는 것들이 있을 거예요. 매거진이든, 브랜드든. 불황이라고 계속 피해자처럼 행동하지만 말고, 그 틈새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의 노하우를 적극적으로 배울 필요가 있다고 봐요.

그간 실장님은 어떻게 진화했나요?
일하는 방식은 세월이 흘러도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아요. 협찬 받고, 찍고, 반납하고, 새로운 브랜드나 신제품 있으면 보러 가고. 하던 일은 다 똑같은데, 이걸 활용하는 방법이 훨씬 다양해졌죠. 나도 그냥 흐름에 맞춰 살아가는 거고. 스스로 달라진 게 있다면 예전보다 좀 더 여유를 찾으려고 한다는 거예요. 얼마 전에 몰디브로 여행을 다녀왔는데, 그간 보이지 않던 게 보이더라고요. 물속에 가오리가 헤엄치는 것만 봐도 좋고, 땅에 떨어진 꽃 한 송이가 또 그렇게 좋고. 분명히 한국에서도 그런 걸 찾으면 보일 텐데 여기선 너무 업계와 트렌드에 휩쓸려서 그런 단순한 것들을 못 보고 사는 거죠.

보면 늘 긍정적이라 좌절을 잘 안 할 것 같은데….
어우, 너무 좌절하지. 난리 나지, 죽고 싶지 막!

어머 정말요? 그럼 그 순간을 어떻게 극복하세요?
딱 그때뿐이야. 하하하! 밤새 ‘아우 짜증나! 쟤를 죽여, 살려?’ 하다가도 자고 일어나면 너무 상쾌하고, 막 화를 내다가도 갑자기 매콤한 동아냉면이 먹고 싶고 막 그래요. 그래서 정신없이 먹고 나면 그때부턴 또 다른 걱정(살 뺄 걱정)이 밀려오잖아요. 내가 이래. 배알도 없고, 어떨 땐 바보 같고.(웃음)

지금 한혜연이라는 이름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가 됐잖아요. 책을 내든, 의류 사업을 하든, 뭘 해도 통할 거라 생각되는데, 앞으로 더 도전해보고 싶은 게 있을까요?
그냥 가늘고 길게 살고 싶어요. 우직하게. 저 되게 보수적이거든요. 요행을 안 바라고, 무리수를 두지 않고 그냥 늘 하던 대로 내 할 일을 하고 사는 거죠. 사실 말로는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게 많은데… 도전하는 거랑 무리수를 두는 건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봐요. 내가 늘 하던 것에서 조금 더 노력해서 새로운 걸 이뤄낼 수는 있어도, 가당치도 않은 걸 욕심낸다거나, 뭐 점을 봐서 투자를 한다거나 그런 건 절대로 안 해요.

실장님에게 가장 이상적인 삶은 어떤 것인가요?
요새 돌연사가 워낙 많아서 그런가, 이런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은데… 나는 행복할 때 사라지면 좋겠어요. 나 혼자 잘 살겠다고 아등바등하기보다는, 주변을 돌아보면서 좀 우아하게 사는 거죠. 그리고 그런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시간이 좀 길었으면 하고요.

EDITOR박정하

PHOTO이재안

2018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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