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YLE / MEMO
Oct 10, 2017

번역의 실종

번역, 오해와 설득을 가르는 한 끗.

번역의 실종

쥘 베른이 1869년에 내놓은 SF소설의 한국 제목은 <해저 2만 리>다. 10리는 약 4km이니 이 제목대로라면 소설의 주역인 잠수함 노틸러스호가 누빈 거리는 약 8000km인 셈이다. 서울에서 로스앤젤레스까지 직선 거리가 9000km가 넘으니, 네모 선장의 노틸러스호가 남극, 대서양, 홍해, 태평양을 누빈 거리치고는 지나치게 짧다. 어쩌다 이렇게 짧아졌을까? 비밀은 오역에 있다. 프랑스어 원제는 ‘바다 아래 2만 리외 Lieue의 여정’인데, 이 단위는 과거 유럽에서 ‘한 사람이 1시간 동안 걸어가는 거리’, 즉 영어의 ‘리그 League’를 뜻하는 단위로 2만 리외면 8만 km다. 10분의 1로 줄여버린 셈이다. 오역의 원인은 중역이다. 일본도 ‘리 里’라는 단위를 쓴다. 다만 일본의 1리는 한자는 같지만 우리나라 1리의 10배다(1리가 약 4km로 프랑스의 ‘리외’나 영어의 ‘리그’와 거리가 비슷하다고 한다). 일본에서 그대로 가져오다 보니 <해저 2만 리>가 되어버린 비극. 제대로라면 <해저 20만 리>가 맞지만 이미 수십 년 동안 <해저 2만 리>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지금 와서 고치기엔 너무 늦었다.
이런 식으로 늦어버린 오역은 또 있다.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는 알렉상드르 뒤마 필스 Alexandre Dumas Fils (<삼총사> 작가인 알렉상드르 뒤마 페르의 아들)의 소설 <동백의 여인 La Dame aux Camélias>을 각색한 작품. 우리보다 먼저 번역된 일본에서는 이를 ‘쓰바키히메 椿姬’라 번역했다. ‘쓰바키’는 일어로 동백을, ‘히메’는 여인을 뜻하니 ‘동백 여인’인 셈이다. 그러나 이 또한 문제가 생겼다. 과거 무라카미 하루키를 ‘촌상춘수 村上春樹’라고 읽었던 것처럼 한자를 그대로 읽어 ‘춘희’라고 써버린 것이다. 번역가 이강룡은 자신의 저서에서 “<춘희>라는 말을 듣고 ‘동백꽃의 여인’을 떠올리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며 게다가 일본에서 동백나무를 뜻하는 ‘쓰바키 椿’의 한자가 한국에선 참죽나무를 뜻해 “중역의 문제점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고 꼬집기도 했다.
번역가들에게 물으니 오역의 대부분은 익숙한 단어를 의심하지 않는 게으름 때문에 생긴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가장 대표적인 게 헤밍웨이의 ‘Dolphin’이다. 이전까지 <노인과 바다>에는 ‘내일은 돌고래 Dolphin를 먹을 거야. 노인은 이를 도라도라고 불렀다’라는 문장이 나왔다. 대체 얼마나 배가 고프면 그 귀여운 돌고래를 먹을 수 있는 걸까? 사실 도라도는 태평양과 대서양에 서식하는 대형 어종으로, 스테이크를 해 먹으면 정말 맛있는데, 영어로는 ‘돌핀피시 Dolphin-fish’, 스페인어로는 ‘도라도 Dorado’, 하와이어로는 ‘마히마히 Mahi-Mahi’라고 부르는 종이다. 이는 너무도 익숙한 돌핀이라는 단어 때문에 스페인어의 도라도를 찾아보지 않아 생긴 오역이다. 반면, 일부러 오역을 하는 경우도 있다. 소설가 홍형진은 허프포스트 블로그에 아사다 마오가 ‘구야시이(부르르)’라는 표현을 할 때마다 한국 언론이 ‘억울하다’라고 옮긴 것에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외교관 출신인 신상목의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에는 ‘구야시이’의 뉘앙스를 지적한 대목이 나온다. 한국어 ‘억울하다’는 ‘자신의 잘못이 아닌 남의 잘못으로 자신이 안 좋은 일을 당하거나 나쁜 처지에 빠져 화가 나거나 상심하는 것’을 뜻하지만, ‘구야시이’는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남과의 경쟁에서 패하거나, 남이 자신에게 해코지를 하여 분하거나 유감의 심정이 되는 것’을 뜻한다고 설명한다. 신상목은 억울한 사람은 결국 남을 원망하는 마음에 이르게 되고, ‘구야시이’한 사람은 자신을 책망하는 마음에 이르게 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꼬집어 지적한다. 즉, 아사다 마오가 사용한 단어의 뉘앙스만 놓고 따지면 당연히 ‘분하다’에 더 가깝다. 그럼에도 언론들이 이를 ‘억울하다’로 번역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사다 마오가 억울해하면 이를 읽는 국내 독자들이 더 극적인 희열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해서였을까?
최근에 가장 흥미로운 번역 이슈는 바로 ‘두고 보자’였다. 지난 9월 초 미 백악관 기자단 중 한 명이 “북한을 공격할 예정이냐”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묻자 그는 “두고 보자 We’ll see”라고 답했다. 미국의 언론들은 ‘공격이 있을 수도 있다는 애매모호한 입장을 표했다’고 해석한 반면 한국의 한 매체는 제목을 이렇게 뽑았다. “北 도발에 트럼프 ‘두고보자’… 초강경 대북 압박 시사”. 아마 트럼프의 평소 화법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마치 당장 전쟁이라도 할 듯한 제목을 뽑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트럼프는 평소에도 대답하기 힘든 모든 질문에 ‘두고 보자’라고 답하기 때문이다. 이걸 뭐라고 번역하면 좋았을까? 어쨌든 우리말의 ‘너, 이 자식, 두고 보자’에서의 호전적인 ‘두고 보자’와는 분명 다른 말임에는 틀림없다. 미국의 정치 매체 폴리티코는 이를 꼬집어 ‘도널드 트럼프는 회피할 때마다 두고 보자고 말한다’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기자들이 허리케인 ‘어마’ 대응 방안을 물었을 때도, 국가 부채 한도 상향 기한을 3개월 연장하는 데 국회랑 합의했느냐고 물었을 때도, 지금은 경질된 백악관 최고 전략 책임자 스티브 배넌의 미래에 대해 물었을 때도, 트럼프는 ‘두고 보자’고 말했다. 그러니 어쩌면 트럼프의 ‘두고 보자’는 오히려 ‘잘 모르겠다’로 해석하는 편이 더 본의에 가까울 것이다. 전 세계 다양한 뉴스들이 흘러넘치고 국가 간의 경계 없이 콘텐츠가 넘실거리는 이 시대에 펜을 쥔 사람이 왜곡을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번역보다 쉬운 게 없다.

WRITER박세회

PHOTO전세훈

EDITOR강혜영

2017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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