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TRAVEL / COVER STORY
Nov 12, 2017

사물이 만든 거주지

사랑의 기쁨을 간직한 순간. 사진가 정희승이 포착한 <헤렌>의 행간을 보았다.

볕이 들이치는 작업실, 산란하는 풍부한 빛 아래 앉은 정희승 작가.

볕이 들이치는 작업실, 산란하는 풍부한 빛 아래 앉은 정희승 작가.

한가로운 목동의 주택가에 자리한 정희승 작가의 작업실 큰 창으로 볕이 들이친다. 테라스에서 볕을 쬐던 반려 고양이 만두가 낯선 이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와 몸의 언어로 인사를 건넸고, 도톰한 남색 니트를 어깨에 걸친 작가는 따뜻한 차를 내왔다. 어떤 표지는 마침표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행위의 마무리가 이끌어내는 시작. 사진가 정희승의 <헤렌> 11월호 아트판 커버 작업도 개입되지 않은 마무리의 순간에 발견된 감각이다. 그 변화하며 지속하는 순간에 포착한 정희승의 새로운 행간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형태와 높낮이가 각기 다른 사물들이 연극의 장면처럼 한데 놓여 있다.
형태와 높낮이가 각기 다른 사물들이 연극의 장면처럼 한데 놓여 있다.

지난 8월 19일부터 10월 18일까지, 여름에서 가을로 시간이 익어가는 동안 고은사진미술관에서 정희승의 <스탄차: Stanza> 전시가 열렸다. 고은사진미술관에서 2013년부터 진행해온 ‘시작과 시작’의 프로젝트 <중간 보고서> 시리즈 전시 중 하나로 작가의 9년간 주요 작업을 망라한 세미 회고전의 형식을 띤 전시였다. 긴 벽을 따라 늘어선 사진을 점자를 읽듯 눈으로 만지며 읽는다. 사진이 숨을 쉬고 뱉는 호흡의 간격에 맞춰 걸음걸이에 운율이 생긴다. “전시 제목인 ‘스탄차’는 이탈리아 미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책 <행간>에서 따온 말이에요.” 1920년대의 시인들이 그들의 시에 핵심적인 요소, 시의 ‘거주지이자 피난처’가 되는 공간을 ‘스탄차(행간)’라 부른 것에서 명명한 제목. 작가는 책에서 아감벤이 말한 아래 내용을 전시에 인용했다. “시의 모든 형식적인 요소들뿐만 아니라 그들이 시의 유일한 대상이라고 여겼던 ‘사랑의 기쁨 joi d’amor’을 행간이 간직하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랑의 기쁨’이라는 대상은 과연 무엇인가? 어떤 종류의 기쁨을 위해 시의 행간이 모든 예술의 요람이 되는가? 무엇을 중심으로 그 노래가 한 공간으로 그토록 집요하게 모여드는가?” 커버 작업과 함께 새로 보내온 작가의 포트레이트에선 이전과는 또 다른 맑은 잿빛의 오묘한 오라가 묻어났다. 최근 다시금 배우와 연출자들의 포트레이트를 찍고 있다는 작가의 말을 들은 터라 작가 자신에게서 담아내고 싶은 얼굴은 어떤 모습이었을지 궁금했다. “처음엔 조명을 쳐서 찍었는데 아니더라고요. 카메라를 응시하는 나의 모습을 견딜 수가 없고. 그래서 햇빛 비치는 창가에서 찍었죠. 이 공간에서 촬영하다 보면 햇빛이 계속 들이치며 컬러가 바뀌어요. 게다가 실수로 초록색 유리를 끼웠더니 사진 찍으면 한쪽에는 초록이 돌고 한쪽은 빨갛고, 파랗고. 색이 엄청 돌거든요. 컨트롤 하기가 어려워 계속 옮기면서 찍어야 하지만 저는 그런 변화무쌍함이 좋더라고요. 빛이 산란하면서 풍부해지는 느낌이요.” <헤렌> 아트판 커버를 두 번째 맡은 정희승은 섬세한 감각과 취향으로 사물에게서 의외의 얼굴을 발견한다. “지난해 <헤렌>의 구두 화보를 찍을 때 저랑 친한 사진가가 도와주러 왔어요. 그때 촬영하는 걸 보면서 그 친구가 ‘언니는 사물을 찍을 때도 사물의 얼굴을 찾는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 얘기를 들으니 정말 그런 것 같았어요. 내 사진의 주체는 인물에서 사물로 바뀌었지만 결국 사물에서도 얼굴을 찾고 있었던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죠.” 이번 커버 작업에서는 사물의 소재나 형태적 질감, 컬러를 보여줄 수 있는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출발해 ‘니트’라는 소재를 선택하게 됐다. “이번 시즌 버버리 컬렉션을 우연히 봤는데 니트가 정말 아름답더라고요. 그게 생각이 나서 제안한 거죠. 니트 본래의 질감이랑 컬러가 굉장히 섬세하고 풍부한 측면이 있잖아요. 그런 걸 회화적으로 보여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버버리 니트를 플랫하게 찍은 사진은 얼핏 추상화처럼 보이지 않나요? 얼마 전 집에서 영화 <디올 앤 아이>를 VOD로 보았는데 거기에서도 스털링 루비의 회화에서 영감을 받아 작업하는 신이 나오더라고요. 실제로 패션 디자이너들이 페인팅에서 영감을 많이 받잖아요. 그래서 패브릭을 페인팅처럼 보여주는 것도 아름답겠다 싶었죠. 날씨도 추워지니까 푹신한 니트의 질감이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겠더라고요.” 마치 스코틀랜드 벌판을 항공사진으로 찍은 것처럼 드넓은 컬러 블록은 작가가 가장 먼저 카메라에 담은 풍경이다. 사진에선 그녀가 영국에 머무르며 들른 스코틀랜드 대자연에서 느낀 알싸한 공기와 다정함이 묻어난다.
정희승은 촬영할 오브제를 보러 다니다 마침 투박하면서도 분위기 있는 기둥과 컵걸이를 발견했다. 마르셀 뒤샹이 레디메이드 컵걸이를 차용한 작품이 연상되는 조형적으로도 흥미로운 형태. 철제의 차가운 질감과 니트의 따뜻한 질감을 중첩해보고 싶어서 선택한 오브제인데 정작 촬영하기 위해 가져와보니 그 강렬한 형태성 때문에 어울리지 않았다고 했다. 대신 촬영을 마친 후 배경지를 내리는 주황색 도르래, 바닥에 컵걸이와 사다리, 기둥과 테이블이 제멋대로 놓인 풍경이 한 화면에 담겼다.

이번 버버리 F/W 시즌 컬렉션의 대표 아이템인 멜란지 니트 소재의 섬세한 질감과 색감, 직조된 패치워크 컬러 블록이 한 폭의그 림처럼, 스코틀랜드의 평원이 연상되도록 촬영했다.
이번 버버리 F/W 시즌 컬렉션의 대표 아이템인 멜란지 니트 소재의 섬세한 질감과 색감, 직조된 패치워크 컬러 블록이 한 폭의그 림처럼, 스코틀랜드의 평원이 연상되도록 촬영했다.

투박하면서 처연한 분위기의 기둥에 푹신하고 따뜻한 니트 소재 의상이 꽃처럼 피어났다.
투박하면서 처연한 분위기의 기둥에 푹신하고 따뜻한 니트 소재 의상이 꽃처럼 피어났다.

정희승의 ‘ROSE IS A ROSE IS A ROSE’ 시리즈 중 ‘UNTITLED #05’ 작품 앞에 구찌의 퍼 장식 골드 뮬, 에나멜 가죽 소재의 오렌지색 루이 비통 부츠와 미우미우의 퍼 소재 체크 모자가 회화처럼 놓인 풍경.
정희승의 ‘ROSE IS A ROSE IS A ROSE’ 시리즈 중 ‘UNTITLED #05’ 작품 앞에 구찌의 퍼 장식 골드 뮬, 에나멜 가죽 소재의 오렌지색 루이 비통 부츠와 미우미우의 퍼 소재 체크 모자가 회화처럼 놓인 풍경.

“오브제의 높낮이와 형태가 각기 다른데 한데 놓여 있는 모습이 연극적인 장면처럼 보이더라고요. 막상 해보기 전엔 잘 모르잖아요. 그런 거죠. 벽에 붙여둔 제 장미 시리즈 사진 앞에 부츠와 뮬, 퍼 모자 같은 촬영 제품을 늘어놓았는데 촬영을 마무리하다 그 장면이 그저 예뻐서 찍은 것처럼요. 큰 의미는 없어요.” 우리는 그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큰 의미가 없는 무위의 노력에서 생경한 행간이 무심결에 튀어나오는 순간. 결국 표지는 의미 없이 아름다운 그 사진이 되었다.
행간을 짓는 목수는 작품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하기보다 그저 그 공간에 ‘있는’ 경험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그 순간에 머무르며 그것이 감정이든 무엇이든 경험하게 되기를 바라며. 정희승 작가의 작업도 그렇다. “알랭 바디우의 인터뷰에서 기억에 남은 구절이 있는데, ‘예술에 있어서 주체는 어디에 있느냐?’ 그게 작가인지 작품에 있는 건지 아니면 관객에게 있는 건지를 묻는 질문이었어요. 거기에 대해 바디우가 “예술의 주체는 작품의 궤적이다”라고 답하거든요. 작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별적인 작품 하나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 세계 전체를 들여다봐야 한다는 거죠. 무척 공감 가는 말이더라고요. 제가 전시를 준비할 때나 현재 만들고 있는 이미지에 대해서 어떤 고정된 의미로 못 박지 않으려 하는 것, 조금은 헐렁한 상태로 남겨두려 하는 이유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또 변할 것을 알기에 그런 여지를 남겨두는 것 같아요.” ‘살구나무 아래 농익은 살구가 떨어져 뒹굴 듯이/ 내가 서 있는 자리에 너무 많은 질문들이/ 도착해 있다// 다른 꽃이 피었던 자리에서 피는 꽃’. 사진가 정희승의 사물이 만들어낸 거주지이자 도피처인 이번 <헤렌>의 아트판 커버는 문득 김소연 시인의 시 ‘누군가 곁에서 자꾸 질문을 던진다’에 나오는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사랑의 기쁨을 간직한 순간. <헤렌>이 지나온 궤적은 거주지이자 피난처가 된 행간의 노래들 그 자체다.

EDITOR이다영

PHOTO정희승, 장다원

2017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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