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TRAVEL / ARCHITECTURE
Jul 13, 2017

제주에 핀
유리알 유희

지난 2008년 지니어스로사이로 개관한 안도 다다오의 건축물이 유민미술관으로 재개관했다. 섭지코지에 피어난 아르누보 유리공예는 또 하나의 제주 풍경이 되었다.

제주 휘닉스 아일랜드 내 유민미술관 정문에서 정원을 지나 미술관 내부로 들어가는 길. 자연 풍경을 건축으로 끌어들이고자 한 안도 다다오의 건축관을 뚜렷이 느낄 수 있다.

제주 휘닉스 아일랜드 내 유민미술관 정문에서 정원을 지나 미술관 내부로 들어가는 길. 자연 풍경을 건축으로 끌어들이고자 한 안도 다다오의 건축관을 뚜렷이 느낄 수 있다.

동트는 새벽빛이 어슴푸레 내린 것 같은 섭지코지의 해안 풍경이 얇고 기다란 색유리판 속에 담겨 있다. 변화무쌍한 날씨와 아름다운 풍경. 콘크리트 벽을 마주하고선 볼 수 없었던 반대편 풍경을 담은 이 색유리 조형물은 정면을 보면서도 뒤를 생각하게 하는, 막혀있는 곳에서도 열린 틈을 떠올리게 하는 명상의 요소다. 2008년 제주 휘닉스 아일랜드 내에 문을 연 지니어스로사이의 새로운 얼굴. 안도 다다오가 섭지코지의 자연에서 영감을 얻어 설계한 수도자적 공간이 올 6월부터 유민미술관으로 재개관한다. 미술관의 공간 디자인을 맡은 덴마크 건축가 요한 칼슨은 새로운 이름 앞에 짙은 화장 대신 맑은 눈 하나를 더함으로써 작지만 큰 변화를 이끌어냈다. 요한 칼슨이 일명 ‘샤이닝 글라스’를 고안한 이유는 첫 전시인 유리공예 작품전과도 맞물린다. 고 홍진기 중앙일보 선대 회장의 호 ‘유민’을 딴 유민미술관에서 그가 평생에 걸쳐 모아온 아르누보 유리공예 컬렉션 47점을 처음으로 선보이기 때문이다. 전시장 내부를 채우는 유리공예 작품에 대해 요한 칼슨은 “아르누보식 유리 세계로의 일탈에 대해 매우 독특한 경험을 기대해도 좋습니다. 유리 작품은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색과 깊이, 반사, 동물과 꽃 그리고 빛의 층들에 대해 더 많이 느낄 수 있어요. 시간을 넉넉히 가지고 전시회를 관람하길 추천합니다”라고 말한다. 기존 안도 다다오의 건축관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자신만의 손길로 또 다른 제주의 자연을 담은 요한 칼슨. 고요한 공간에 마음의 창을 단 듯한 울림이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유민미술관으로 재개관하면서 덴마크 건축가 요한 칼슨이 ‘샤이닝 글라스’를 더해 건축에 새로운 풍경을 들여왔다.
유민미술관으로 재개관하면서 덴마크 건축가 요한 칼슨이 ‘샤이닝 글라스’를 더해 건축에 새로운 풍경을 들여왔다.

자연의 품에 깃든 건축

주변 경관을 해치지 않고 자연 속에 깃드는 건축을 지향하는 안도 다다오는 지니어스로사이 내부를 점차 아래로 내려가는 미로 형태로 지었다. 땅에서 시작해 조금씩 깊은 땅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과정은 자연과의 어우러짐, 그리고 궁극에는 어떻게 자연 속으로 다시 돌아갈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하게 한다. 고운 선을 그어놓은 듯한 정문으로 들어오면 아름다운 정원이 펼쳐지고 오른편 리셉션 공간에서도 요한 칼슨이 재구성한 샤이닝 글라스 벽면을 볼 수 있다. 각도에 따라 다양한 풍경을 담아내는 벽면은 또 다른 형태로 아름다운 제주의 자연을 보여준다. 

유민미술관 내부로 들어서면 돌, 바람, 여인 세 가지 테마의 아기자기한 정원이 펼쳐진다. 노출 콘크리트로 자신만의 공간을 만든 후 그 공간에 물과 빛과 바람 등 자연적인 요소를 끌어들이는 것이 특징.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안도 다다오가 디자인한 또 하나의 건축물 글라스 하우스도 그 풍경을 해치지 않는 선으로 이어진다. 유민미술관 돌담과 벽이 수평선처럼 평행으로 이어지는 너머로 성산일출봉이 맑게 보인다. 시시각각 변화무쌍하게 움직이는 구름과 바람, 빛이 자유자재로 공간을 드나들고, 먼바다의 물소리를 길어온 듯 길 양옆으로 낸 벽을 따라 떨어지는 인공 폭포 소리가 경쾌하다. 그렇게 한동안 사방에서 불어오는 자연의 경이를 만끽하고 나면 고요히 땅속으로 파고드는 어둡고 서늘한 공간이 등장한다. 그리고 캄캄한 그곳에는 자연을 미학으로 소유하고자 했던 프랑스 아르누보 낭시파의 유리공예 작품들이 불을 밝히고 있다.

높이가 다르게 지어진 유민미술관 전시장 내부. 높은 층고 속에서는 절로 마음이 고요해진다.
높이가 다르게 지어진 유민미술관 전시장 내부. 높은 층고 속에서는 절로 마음이 고요해진다.

에밀 갈레가 전성기 시절 정성을 쏟아 작업한 ‘바다의 심연’.
에밀 갈레가 전성기 시절 정성을 쏟아 작업한 ‘바다의 심연’.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램프 작품과 함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라운지 공간이 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램프 작품과 함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라운지 공간이 있다.

곧 꽃망울이 터질 듯 섬세하게 표현된 사프란 꽃잎 모양의 램프와 다른 작품들.
곧 꽃망울이 터질 듯 섬세하게 표현된 사프란 꽃잎 모양의 램프와 다른 작품들.

낭시파 아르누보의 정수

프랑스 북쪽, 독일과 맞닿아 있는 로렌 지방의 작은 도시 낭시. 그곳에서 활동했던 작가들의 유리공예 작품 47점이 각기 다른 테마의 방에 놓여 있다. 아르누보를 이끈 예술가들 중 낭시파는 당시 유행하던 자포니즘 Japonism 중 특히 예술에 자연을 투영하고자 했던 예술 개념과 맞닿아 발전한 문화 조류다. 19세기 말 1890년대부터 20년간 회화, 가구 디자인, 유리공예 등 다방면에서 유럽을 휩쓴 아르누보 양식의 대표적 특징 중 하나다. 생태학을 전공한 에밀 갈레를 필두로 돔 형제, 외젠 미셀, 르네 랄리크, 금속 공예와의 결합을 이뤄낸 루이스 마조렐 등이 낭시파 아르누보를 이끈 대표 인물. 산업화가 진행되며 기계 문명의 등장으로 등한시되었던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예술가들이 주를 이룬다. 따라서 전시된 작품은 대부분 자연을 모티프로 하며 그들에겐 새로운 충격으로 다가왔던 일본 미술의 영향을 받았기에 동양적인 정서도 다분하다. 여기에 시간을 거치며 다양해진 기법과 장인적 솜씨를 결합해 예술의 경지에 이른 작품들이 유리공예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매력을 보여준다. 안예진 학예연구사는 “파리의 유리공예가 패턴으로 양식화된 반면 낭시 지역의 유리공예는 사실주의적 특징이 두드러집니다”라고 설명한다. 

슬리퍼로 갈아 신고 바닥에 짚을 깐 공간으로 들어가면 바로 전시가 시작된다. 십자로 길이 난 공간에는 기술적인 설명을 위한 작품들이 쇼케이스 안에 전시되어 있고, 그 사방으로 열린 방으로 들어가면 각기 다른 네 가지 테마로 작품이 놓여 있다. 첫 번째 ‘영감 靈感의 방’으로 들어서면 바람에 억새풀이 흔들리는 영상이 고요히 흐르고 그 옆에 화병 다섯 점이 놓여 있다. “제주에 있는 자연을 이 공간 속에서도 느낄 수 있게 요한 칼슨이 영상을 설치했어요. 제주의 꽃과 하늘,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풀을 촬영해 담았죠. 이 방은 이곳이 명상센터였을 때의 느낌을 활용해 공간을 꾸몄습니다. 앉아서 오래 보며 감상할 수 있도록 짚방석 자리와 낮은 나무 스툴을 뒀어요.” 

짚자리에 앉아 화병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보들레르의 시구 중 ‘분홍빛 연무’라는 표현에서 영감을 받은 화병이다. 물결치는 유리병 입구를 따라 내려오는 분홍빛 연무 위로 잠자리가 날고 마치 바람을 연상케 하는 섬세한 레이스가 너울거린다. 건너편에 있는 또 다른 에밀 갈레의 작품 ‘잠자리 무늬 화병’에는 특허 낸 에나멜 기법으로 섬세하게 그린 잠자리가 고혹스러운 날갯짓을 하고 있다. 그 옆에 함께 전시된 돔 형제의 화병은 유리를 갈아 그 위에 색가루를 찍어 얹어 굽는 방식으로 도자 같은 빛을 띠도록 했다. 솔뤼플뤼에의 긴 목을 따라 맺힌 한두 방울의 물방울, 그 아래 세밀하게 그린 풍경화는 쓸쓸한 가을날의 회한을 담은 듯 보인다. 금방이라도 무수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올 듯 사실적이고 풍부한 세계가 화병 하나하나에 담겨 있다. 방을 빠져나오는 데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보들레르의 시구 ‘분홍빛 연무’에서 영감을 받아 작업한 에밀 갈레의 화병.
보들레르의 시구 ‘분홍빛 연무’에서 영감을 받아 작업한 에밀 갈레의 화병.

이번 전시에서는 점차 다양하게 변화한 유리공예 기법을 감상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점차 다양하게 변화한 유리공예 기법을 감상할 수 있다.

‘명작의 방’에 단독 전시된 버섯 램프. 에밀 갈레의 최고 전성기로 평가되는 1902년 변호사 헨리 허쉬의 주문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명작의 방’에 단독 전시된 버섯 램프. 에밀 갈레의 최고 전성기로 평가되는 1902년 변호사 헨리 허쉬의 주문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검은 잉크로 사라지는 삶

‘아르누보 전성기의 방’이라 이름 붙인 공간에서는 식물과 자연을 깊이 관찰하고 사색하여 그 의미를 찾고자 한 작품들을 볼 수 있다. 1889년과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에서 에밀 갈레가 그랑프리를 획득하며 아르누보는 정점에 이르렀고, 이후 갈레는 혁신적인 유리공예 기법 연구에 몰두하며 연달아 특허를 냈고, 다른 낭시파 예술가들도 자신만의 공예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런 혁신은 프랑스 현대 공예 부활의 원동력이 되었고, 프랑스 아르누보의 중심이 되었다. 그 열정적 시기에 흠뻑 취해볼 수 있는 작품이 바로 한쪽 벽면에 딱 한 점만 디스플레이한 에밀 갈레의 ‘바다의 심연’이다. 붉은 튤립 꽃잎 모양의 화병에는 당시 쉽게 볼 수 없었던 바닷속의 풍경이 역동적으로 그려져 있다. 쥘 베른의 소설 <해저 2만리>를 보며 상상했을까? 그의 절친한 친구 젤러가 연구했던 해양 식물, 양치류와 함께 산호초가 흔들리며 피어 있는 모습은 마치 그 붉은 심연 속으로 뛰어든 듯 역동적이다. 
“이곳 ‘명작의 방’에는 단 한 점의 작품만 있습니다. 프랑스 아르누보를 이끌었던 에밀 갈레의 예술 철학과 전성기의 공예 기술이 집약되어 있는 최고의 작품을 만날 수 있지요. 이런 버섯 작품이 전 세계에 총 5점 있는데, 그중 가장 보존이 잘되어 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어둡고 둥근 원형 공간 가운데 빛을 발하며 솟아난 버섯. 다 자라면 하룻밤 사이 갓이 액화되어 먹물 같은 액체를 뚝뚝 떨어뜨리며 죽는다고 하여 일본에서는 ‘하룻밤의 버섯’이라 불리는 먹물버섯이다. 청년, 중년, 노년을 형상화한 버섯의 이야기.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조명 앞에서, 이를 예술로 승화시키고자 고심했고 또 그 작품을 가장 잘 보여주기 위해 더 나아간 고민으로 벽을 디자인한 건축가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었다. 마치 자신의 마지막 순간과도 같은 어둠 속에서 신비롭게 빛을 발하는 버섯의 모습은 안도 다다오가 구현한 명상 공간과 요한 칼슨이 고심한 공간 디자인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은 듯했다.

계단을 타고 2층으로 올라가면 라운지 공간이 ‘램프의 방’으로 꾸며졌다. 휴식할 수 있는 공간은 그대로 둔 채 한쪽 벽면에 전시된 램프를 편안하게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에밀 갈레 사후 더욱 빛을 발한 돔 형제가 전기 기술의 발전과 함께 생산하기 시작했던 램프들은 <유민 아르누보 컬렉션> 전시의 끝을 은은하게 장식한다. 전시 디자인을 맡은 요한 칼슨의 말처럼 자꾸만 멈추고 뒤돌아 다시 길을 잃고 싶은 공간. “제가 좋아하는 관람 방식은 각 공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방마다 모두 독특하게 꾸몄는데, 과연 어떤 공간이 펼쳐질지 기대하게 만드는 것이 설계의 포인트였죠. 기존 갤러리와는 확실히 차별화되는 공간인 만큼 관람객이 지나간 길을 다시 되돌아오거나 멈추어 주위를 둘러보며 작품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기를 추천합니다.” 한동안 미로 같은 전시장을 돌며 어둠 속에서 유리공예의 세계에 있다 밖으로 나와 제주 풍경을 바라보니 주변에 불어오는 자연의 빛과 소리가 새롭게 다가왔다. 보이지 않는 것들에 한걸음 다가간 기분. 이 공간을 꾸린, 또 그 시절 아르누보를 이끌었던 예술가들이 꿈꿨던 이상향이 바로 이곳 제주에 펼쳐진 풍경 아니었을까. 유민미술관에서 6월부터 열리는 <유민 아르누보 컬렉션> 전시는 상설전으로 매주 화요일을 제외한 모든 요일에 관람 가능하다.   

EDITORLEE DA YOUNG

PHOTOGRAPHYLEE JAE AN

DESIGN김민정

2017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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